//phapthaysajin.com/wp-content/uploads/2019/11/Untitled-02_re.jpg

나를 비추이는 꽃우물의 너는 누구인가
양효실(미학, 비평)

약한 것들은(이) 모여 있다. 모여 있는 것들은(이) 약한 것들이다. 강한 것들이 주인인 세계에서 그것이 주변부적 삶의 비의(秘儀), 비의(秘意), 아니 비의(非意)다. 모여있는 것은 그 자체로 흉측하거나 아름답거나 기이하다. 모여 있는 것은 면적을 늘리면서 감염의 시각적 형상을 현시하고, 무늬를 이루면서 시이고, 장소를 형성하면서 대체불가능한 서사를 시작한다. 움집이나 판잣집처럼 ‘임시’를 내포한 거처는 ‘앞’집이나 ‘옆’집에 이어지고 기워지면서 편평한 면직물이나 조각보나 퀼트처럼 늘어난다. 앞이나 옆이 없으면 허물어질 것처럼 서로에게 의지한 집들은 개체로 식별되지 않는다. 그저 사이를 터주는 길이, 끼니를 알리는 굴뚝 연기가 전체와 부분을 살짝 가를 뿐이다. 그런 집은 엔딩이나 마침표를 모르는 이야기 같고 그래서 돌림노래 같다. 안에서, 또 제 영혼에 들어앉아서 제 생각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을 고독하거나 고립된 인간들은 살 수 없는 집이다.
누설이나 누수에 걸맞을 집이라면 자기를 세우느라 타아(他我)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 사람들의 장소는 아닐 것이다. 그런 곳으로 웃는 사람들이 자꾸 온다. 약한 것들이라면 의당 그럴 것처럼 그들은 제 집, 살림살이, 널빤지를 메고 이고 이곳에 당도한다. 어디든 갖고 다닐 크기의 집과 등속(等屬)이라면 그것은 관념이 아니라 은유인 게다. 몸뚱아리 하나 뉘일 곳이 아닌, 소유를 자랑할 뿐인 집채만한 집의 관념에 저항하려고 시가 있을 것이지만, 그런 고통과 분노 혹은 슬픔의 시는 이곳에서는 지어지지 않는다. 이들의 거처는 너덜너덜하고 웅숭그리고 빈한하기 짝이 없지만, 가여운 몸이 지탱할 정도가 소유인 사람들에게 시는 대립 항(oppositional term) 없이 전부이고 전체다. 시, 숨, 장소, 미소, 신발, 움막이 여기서는 동연적(coextensive)이다. 거대한 볼거리, 대단한 장관을 이루게 되는 가난이고 누추함이기에 여기에는 웃음에 걸 맞는 가난, 허여(許與), 선물뿐이다. 웃음은 가진 게 없는 이들이 없는 것을 나눌 때 내쉬는 날숨이기 때문이다.
아래로 흐르는 강들도 잠시 쉬어갈 요량으로 또아리를 틀면서 속도를 늦추고 그러면 곡선이, 또 노래가 나온다. 이곳 여자들은 그런 곡선 안으로 들어가서 집을 짓는다. 어쩌다 이런 생존법이 생겨났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런 풍경이 출현했고, 이 생존은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이다. 저 시끄럽고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곳에 모여 사는 이들은 사실 우리는 잘 모르는 사람이므로 은유를 통해서나 닿을 수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생의 관념들이 저곳에서는 바스라진다. 강에 얹힌 삶, 강에 맞춘 삶, 강에 적합한 삶에 대해 우리는 조금 알고 있지만 이 강과 사람의 어울림, 혹은 공존을 이해하려면 늘 불충분한 민족지학적 ‘번역’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해발고도 3,900m의 고산지대에 들어선 야칭의 아추가르 불학원(佛學園)은 티베트 불교 종파 중 닝미파에 속하는 학원이다. 만 여 명의 스님 중 특이하게도 비구니가 70%에 달하고 20대 이하의 어린 승려가 절반에 달하는 불학원은 당연히 젊음의 생기, 활력이 넘칠 것이다. 1~3년간의 혹독한 수행이 끝나면 다시 고향 집으로 돌아갈 학승들 중 비구들은 제법 구색을 갖춘 곳에 살고 비구니들은 야룽강의 지류 옆에서 산다. 어느 문화 어느 종교에서건 여성들에게는 낮은 자리가 할당되고, 그래서 그들은 감염에 혹은 시에 더 가깝다. 약하고 부드럽고 물렁거리는 것들은 외부의 침입에 늘 노출되어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자아와 타아의 구분도 보잘 것 없을 것이다. 바깥에, 다시 말해서 죽음에 노출된 삶이 자유(해탈?!)를 획득하는 데 더 유리한 장점인 것도 물론 사실이다. 종교는 잘 죽는 것에 대한 것이고 잘 죽는 자들은 생의 한 가운데에 질병, 타아, 시를 포함할 줄 아는 자들일 것이다. 업을 짓지 않기 위해,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해 수행하는 승려들의 삶, 의식의 엄숙함은 업을 짓기에는 너무 어린 이곳 승려들의 천진난만한 웃음과 맞물리면서 아추가르 불학원의 특수한 장소성을 만들어낸다.
중국에 식민화되어 자치구로 편입된 티베트인들의 역사적 상황은 라싸나 인도의 티벳 임시정부만큼이나 우리에게는 멀리 있는 핍박받는 민족들의 이야기이고, 분리독립을 외치며 분신하는 위구르족이나 티베트인들의 소식은 난민들, 혹은 유민((流民/遺民)의 이야기, 우리가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동시대적 변화의 ‘부수적’ 현상으로 다가온다. ‘난민’으로서 혹은 난민처럼 사유하려는 동시대 윤리와 실제 난민이 겪는 고통과 상실은 분명 다르다. 우리는 난민의 인권을 위해 싸워야 하지만 그것이 진짜 난민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멀리 있는 우리의 인간됨을 위한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다큐멘터리 사진이나 보도사진은 현장의 기록을 통해 주변부적 삶의 추상성에, 상투화에 저항한다. 그러나 이미지로 포화상태인 시대에 우리가 접하는 영상 매체는 거의 모든 것을 시각적 ‘쾌’로, 숭고한 ‘이미지’로 전유하기에 실제 현장은 윤색되어 전달된다.
서구의 시선으로 제3세계나 주변부적 삶의 비참과 고통을 재현한다는 이유에서 보도 사진의 비윤리성이 지적되기도 한다. 즉 서구화의 부산물인바 주변부적 삶의 고통에 대한 서구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윤리적 책임의식 내지 책임의식의 방기에 사진 이미지가 흡수, 이용된다는 비난이 존재한다. 성남훈 작가는 루마니아 난민들의 사진을 시작으로 “정치, 경제, 사회, 전쟁 등으로 고통받는 유민들에 대한 사진”을 자신의 프로젝트로 진행해왔다. 그는 보스니아, 르완다, 코소보,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세계 곳곳 비극의 장소를 제 ‘집’처럼 드나든다. “뉴스적인 상황”을 보충하는 사진, 그렇기에 문자적 이해에 동원·종속된 보도 사진 전문가로서의 소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사진을 갈망하고 있었다. 즉 정치적 상황에 갇힌 인간의 무력함이나 슬픔을 담은 사진이 아닌, 그의 말대로라면 “개인, 사람이 가진 힘, 본질적인 에너지”를 담은 사진이 그에게, 그의 탈진을 보완하기 위해 요청되고 있었다.
그 결과가 2009년의 <연화지정>이었고, 이 사진 프로젝트는 분쟁지역이 아닌 ‘자연’, 폭력적 근대성이 아닌 인간성, 서구적 세계관이 아닌 동아시아 여성성으로의 그의 일시적 환승에 초석이 되었다. <연화지정>은 그렇기에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강렬하고 단단하다. 그는 중국과 분쟁 중인 소수민족 티베트, 분신으로 저항하는 티베트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캄 지역, 혹은 아추가르 불학원에서 그는 자신이 고민하던 “정신적인 주제”, “좀 더 원초적인 근원”을 건드릴 소재를 발견한다. 그는 10월~12월 사이 아추가르 불학원의 승려들이 1인용 움막에서 행한 수행, 말하자면 ‘동안거’를 끝내고 3월 봄맞이 대법회를 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1주일 정도를 오전과 오후 4시간씩 구릉지대에 앉아 큰 스님의 말씀을 듣는 학생들의 얼굴, 표정, 붉은 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광경은 자극적이고 감동적이다. 지난 몇 달 간 그들이 들어가 앉아 있던 일인용 움집들이 간간이 보이고 법회를 끝내고 들판에 앉아 참선을 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인다. 움집의 크기가 한 방향으로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몸집과 같다는 것에, 그렇게작다는 것에, 그 사이에 내린 흰 눈이 배경이 되어서인지 붉은 사람들이 더 작아 보인다는 것에, 혹독한 추위와 얼었을 몸과 그만큼 청명할 마음 아니 없을 마음에, 저렇게 함께 있는 것에 겸허해진다. 추워서 웅크리고 있거나 졸려서 누웠거나 불현 듯 등장한 카메라에 얼굴을 가리거나 법당 안으로 조그맣게 모인 빛 아래로 어깨를 모으고 불경을 읽는 이들은 약하고 착하고 부끄럼이 많다. 그들은 진지한 종교인이면서 미숙한 학생이고 가난한 사람이면서 행복한 이들이다. 카메라를 든 이방인의 동석이나 현존에 그들이 무심한 듯 보이는데, 그건 그들이 지금 자기가 하는 것에 집중, 몰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원거리에서 찍은 야룽강가 비구니들의 판잣집, 구릉지에 모여 아축(Khenpo Achuck) 큰 스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이들은 상호 공명한다. <연화지정>은 풍요의 자연이 없는 곳, 그러므로 죽음이 더 가까운 곳, 그러나 인색한 자연에 더 감사하는 지역 사람들의 혹독한 겨울나기를 희거나 황량한 대지와 붉은 사람들의 대비를 통해 시각적 풍요로 전치시켰다. <연화지정>은 지금/여기를 “천국”으로 생각하는, 지금 행복한 사람들에 대한 사진이다. 잘 죽는 법을 배우려고 모인 이들이 지금 이곳에서 잘 살고 있다는 역설이 이곳을 풍요롭게 만든다. 이곳은 한겨울이지만 어디에나 꽃(조화?!)이 만발해 있고, 신실한 종교인들의 장소이지만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일상의 터전이다. 거친 환경 속 약한 생존법이 전부인 순한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먼 곳의 오래 된 삶을 찾아가면 미래가 기다린다는 오랜 잠언을 또 발견한다.
글로벌에서 아시아로, 난민에서 아시아 여성으로, 기록 사진에서 미학적 사진으로 방향전환을 타진 중인 작가에게 그가 말한 대로 “교두보”가 된 아추가르의 여학생들, 어린 비구니들은 ‘연화지정’이란 사자성어로, 작가가 발견한 꽃의 우물로 특별히 호명되었다. 소수민족의 종교적 삶에 대한 민족지학적 기록이기도 한 <연화지정>에서 클로즈업으로 찍은 비구니들의 초상사진은 조금 다른 자리, 아주 특수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녀들의 추위에 터져버린 뺨은 모두 꽃, 연꽃을 은유한다. 한 겨울 온 몸을 감추고 보호하는 붉은 옷과 추위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었다가 붉은 상처가 된 뺨은 모두 고산지대에 사는 티베트인의 문화적 정체성이고 물리적 지표다. 상처는 감염이고 감염은 약함이고 약함은 반응이고 반응은 관계이고 관계는 자아의 타아로의 외출이고 타아의 환대이다. 붉은 뺨, 기미낀 얼굴, 부르튼 입술은 바깥에서 사는 취약한 삶의 물리적 자연적 문화적 이미지이다. 작가는 “꽃 같은 나이에 세상유혹을 뒤로하고 육도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한”이란 문장을 아추가르의 어린 비구니들에게 부여한다. 존재만으로도 꽃인 아이들, 동무들과 어울려 깔깔거리는 게 제격인 여자애들의 붉은 뺨, 연꽃, 우물의 은유적 대체(substitutions)는 작가의 시적 상상력 안에서 일어나는 유희이다. 그는 근대적 관념에 붙들린 현실을 잠시 내려놓고 이곳 사람들처럼 삶을 갖고 놀고 있다. 그가 꽃, 우물로 호명한 아이들의 뺨이 초상사진의 주제이자 소재이지만 사실 바로 그 옆, 혹은 그 위의 눈빛, 눈의 ‘빛’이, 혹은 그 빛도 우물이다. 그녀들의 맑고 강렬하고 투명한 눈망울이, 그 그윽함이 우리를 매혹한다. 물론 작가가 먼저 매혹당했기 때문이다. 중년의 이방인 사내는 그녀들의 빈한한 처소 앞에서 어둔 실내를 배경으로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그늘의 아이들에게 밀착된 작가의 카메라는 초상사진을 의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이 사진은 붉은 뺨을 가진 소녀들에 매혹된 작가의 위치, 즉 멀리서 온 방문객을 맞이하는 임시가옥 원주민과의 가까움 때문에 자화상 사진으로 역전된다. 맑고 ‘깊고’ 강렬한 그녀들의 눈 속에는 모두 카메라를 든 ‘작은’ 사내, 정체성에 닥친 혼란을 감추고 멀리 뭔가를 발견하러온 작가의 정체성이 ‘존재’한다. 카메라를 든 남자, 보도 사진 전문가인 이의 자아가 타아의 눈 안에 오롯이 담겨버렸다. 그는 꽃을 찍었고 꽃의 우물은 그가 누구인지를 비춰주었다. 작가가 꽃, 심지어 꽃의 우물이라 부른 여자들, 연꽃이 피는 ‘더러운’ 우물은 너무나 맑아서 그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었다. 나르키소스의 샘은 자기 자신의 이미지에 매혹당하는, 타아를 자아로 오인하는, 아니 자아를 타아에 투사하는 인간의 실수, 욕망, 아니 시각 예술가의 운명을 압축하는 상징이다. 먼 곳의 맑고 착하고 약하고 겸손한 사람들의 감염된 피부를 꽃으로 오인한 작가의 초상사진은 결국 그런 사람 중 하나인 자기자신에 대한 재인식/인정(recognition)이다. 그는 잃으러 온 자가 아니라 찾으러 온 자이고 그를 기다린 것은 이미지의 끝이 아니라 다른 이미지였고 다른 이미지는 그가 이미 알고 있는 이미지이고 그것은 자아 혹은 자아이미지이다. 그는 허상을 갈파하는 종교인이 아니라 허상을 갈구하는 예술가이다. 그는 이미지에 붙들려야 하고 이번에는 꽃의 우물에 붙들렸다.
그러므로 작가는 기록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찾아온 위기를 이곳에서 발견한 우물, 자신을 비추이는 맑은 우물에서 해갈/해소한다. 경전이 들어있는 마니차를 돌리면 문맹인 신도들도 경전을 읽은 게 되고, 타르초에 새겨진 말씀이 바람에 흩날리면 거기에 적힌 불경이 세상으로 퍼져나가기에 그 바람을 맞은 이는 불경을 읽은 것과 같아진다는 이 매혹적인 연기(緣起)의 장소에서, 작가는 꽃우물을 발견했고 덕분에 자신도 돌려받았다. 이 선물, 이 주고받음은 서로가 알지 못한 채 일어난 것이라는 점에서 윤리적이다. 방문자, 이방인, 발견하는 자, 호명하는 자인 작가는 타아로서의 자아와 자아로서의 타아라는 너무나 오래된 이미지의 이중적 ‘본질’, 또 정체성은 이미지라는 사실도 되돌려 받았다. 곧 또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작가에게 그가 누구인지를, 자신들의 그윽하게 유혹하는, 말갛게 강렬한 눈으로 알려준 이 배우는 여자들, 작가의 동양인 누이들은 물론 작가만의 꽃이다. 나를 비추고 위로하고 이끄는 뺨, 눈빛은 물론 누구에게나 꽃이다. 그래서 시는 거리에 사는데, 어떤 시는 허술한 집 앞에서 잠시 인사를 나누고 자기들 왔던 곳(고향이나 현장 같은)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몸에 묻어서 여기저기로 계속 퍼지는 데, 그게 우리에게 조금 묻었다.

เธอที่สะท้อนฉันอยู่ในบ่อน้ำคือใคร

ยัง ฮโยซิล (สุนทรียศาสตร์/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

ย่อโดย: ควอน ฮักบง

สิ่งที่อ่อนแอจะอยู่เป็นกลุ่ม สิ่งที่อยู่เป็นกลุ่มนั้นเป็นสิ่งที่อ่อนแอ สิ่งที่รวมตัวกันอยู่จะน่าเกลียด สวยงาม หรือแปลกประหลาดด้วยตัวมันเอง สิ่งที่รวมตัวกันอยู่ขยายพื้นที่ของตัวเองสร้างปรากฎการณ์ทางสายตาที่เหมือนแพร่ระบาด สร้างลวดลาย และกลายเป็นพื้นที่ของมันที่ไม่สามารถทดแทนได้

บางคนชี้ให้เห็นถึงลักษณะที่ผิดจรรยาบรรณของภาพสื่อมวลชน ด้วยเหตุผลที่ว่าสร้างความทุกข์ยากและความทุกข์ทรมานของชีวิตในโลกที่สามหรือพื้นที่โดยรอบจากมุมมองของตะวันตก นั่นคือเป็นสิ่งพลอยได้จากการทำให้เป็นตะวันตก จึงทำให้เกิดเสียง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ว่าใช้รูปถ่ายเหล่านั้นเพื่อสะท้อนความสัมพันธ์ทางการเมืองและความรับผิดชอบทางจรรยาบรรณของตะวันตก นักถ่ายภาพซ็อง นัมฮุน ได้ดำเนินถ่ายภาพในหัวข้อ “ผู้คนที่ทุกข์ทรมานจากการเมือง เศรษฐกิจ สังคม สงคราม และอื่นๆ” โดยเริ่มจากถ่ายภาพผู้ลี้ภัยชาวโรมาเนีย เขาไปกลับสถานที่โศกนาฏกรรมทั่วโลก เช่น บอสเนีย รวันดา โคโซโว และอัฟกานิสถาน ราวกับเป็น ‘บ้าน’ ของเขาเอง รูปที่ทดแทน “สถานการณ์ข่าว” ด้วยหน้าที่ของเขาที่เป็นผู้เชี่ยวชาญด้านภาพประกอบสื่อที่เสริมความเข้าใจทางตัวอักษร แต่จริงๆแล้วเขาต้องการภาพที่ ‘แตกต่าง’ ไม่ใช่ภาพที่บันทึกความเศร้าโศกหรือความไร้พลังของมนุษย์ที่ตกอยู่ในสถานการณ์ทางการเมือง แต่เป็นภาพถ่ายที่บันทึก “พลังที่แท้จริงของมนุษย์”

ผลที่ได้คือ <Lotus Well> ปี 2009 โปรเจกต์ภาพถ่ายนี้ไม่ได้ถ่ายทำที่พื้นที่ขัดแย้ง แต่เป็น ‘ธรรมชาติ’ ไม่ใช่ความรุนแรงแต่เป็นความเป็นมนุษย์ ไม่ใช่โลกของตะวันตก แต่เป็นความเป็นผู้หญิงของชาวเอเชียตะวันออก เป็นการเริ่มต้นการพ้นจากหัวข้อเดิมอย่างชั่วคราวของเขา ทำให้ <Lotus Well> นั้นสวยงาม และซาบซึ้ง

เขาได้พบสิ่งที่เขาคิดมานานที่โรงเรียนวิถีพุทธที่ทิเบต เขาถ่ายทำการมหาปวารณาต้อนรับฤดูใบไม้ผลิในเดิอนมีนาคม หลังจากเช้าพรรษาฤดูหนางในช่วงเดือนตุลาคมถึงธันวาคมไป ใบหน้า สีหน้าของนักเรียนที่ฟังพระภิกษุเป็นเวลาประมาณ 1 อาทิตย์ ช่วงเช้าและเย็น ช่วงละ 4 ชั่วโมง ภาพผู้คนที่สวมใส่เสื้อผ้าสีแดงจำนวนมากรวมตัวกัน และแยกจากกันนั้นเร้าใจและซาบซึ้ง ผู้คนที่ขดตัวจากความหนาว หรือนอนด้วยความง่วง หรือปิดหน้าด้วยความเขินอาย หรือรวมตัวกันอ่านคำสอนภายใต้แสงอาทิตย์เล็กๆที่ส่องเข้าโบสถ์นั้นอ่อนแอ และขี้อาย พวกเขาเป็นศาสนิกชนที่จริงจัง แต่เป็นนักเรียนที่ยังต้องเรียนรู้ เป็นคนยากจนแต่เป็นคนที่มีความสุข พวกเขาดูไม่สนใจคนแปลกหน้าที่ถือกล้องนี้ แต่นั่นอาจเพราะพวกเขากำลังจดจ่อกับสิ่งที่พวกเขากำลังทำอยู่

กระท่อมของพระภิกษุณีที่ถ่ายจากระยะไกล <Lotus Well> เป็นที่ๆไม่มีธรรมชาติมากมาย จึงเป็นที่ๆใกล้ความตายมากกว่า แต่สื่อความอุดมสมบูรณ์ทางการมองเห็นผ่านการอยู่รอดในฤดูหนาวของคนพื้นที่ที่ขอบคุณต่อธรรมชาตินี้ คนสวมใส่เสื้อผ้าสีแดงท่ามกลางพื้นดินสีขาวที่แทบไม่มีอะไรเลย <Lotus Well> เป็นภาพถ่ายคนที่มีความสุขตอนนี้ที่คิดว่าตอนนี้/ที่นี้คือสวรรค์ ความย้อนแย้งจากผู้คนที่รวมตัวกันเพื่อเรียนรู้วิธีตายที่ดี พยายมใช้ชีวิตที่ดีในที่แห่งนี้นั้นสร้างความอุดมสมบูรณ์ให้กับที่นี่ แม้ที่นี่จะเป็นฤดูหนาว แต่มีดอกไม้ (ปลอม?!) บานอยู่ทุกที่ และแม้จะเป็นสถานที่สำหรับศาสนิกชนแต่เป็นที่อยู่อาศัยที่มีรอยยิ้มบนใบหน้าเสมอ พวกเราสามารถพบกับสุภาษิตโบราณว่าหากไปหาชีวิตที่เก่าที่ไกลจะมีอนาคตรออยู่จากผู้คนที่มีเพียงวิธีเอาตัวรอดอ่อนแอท่ามกลางธรรมชาติที่โหดร้าย

นักถ่ายภาพได้แก้กระหายที่ว่าหาความเป็นตัวเองจากที่นี่ ที่บ่อน้ำใสที่สะท้อนตัวเขาเอง ในพื้นที่ของควันนี้ที่กล่าวว่าคำสอนที่สลักอยู่บนเทียน เมื่อปลิวไปตามลม คำสอนบนนั้นก็จะกระจายไปทั่วโลก ผู้ที่ถูกลมนั้นพัดจะเป็นเสมือนอ่านคำสอนเหล่านั้นแล้ว นักถ่ายภาพพบกับบ่อน้ำดอกไม้ แต่ได้ตัวตนของเขาคืน ผู้หญิงเหล่านี้ที่สอนด้วยสายตาที่มั่นคงให้กับนักถ่ายภาพที่ต้องกลับไปในที่ๆของเขาในไม่ช้าว่าเขาเป็นใครนั้นเป็นดอกไม้ของนักถ่ายภาพ แก้มและสายตาที่ส่อง ปลอบ และนำทางเรานั้นแน่นอนว่าเป็นดอกไม้สำหรับทุกคน  การเกิดจากความพึ่งพา เกิดที่ตัวเราเล็กน้อย

 

* เป็นการแปลจากบทย่อ อาจไม่สามารถสื่อความหมายอย่างแท้จริงได้